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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Inception, 2010

SF, 스릴러, 드라마, 미스터리
미국, 영국
147 분
개봉 2010.07.21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 
주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코브)
        와타나베 켄 Ken Watanabe 사이토 역
        마리온 꼬띨라르 Marion Cotillard 맬 역   
        엘렌 페이지 Ellen Page 애리어드니 역
국내 12세 관람가/해외 PG-13  
http://www.inception2010.co.kr/



<다크나이트>의 위용 때문이었는지, 깜빡하고 있었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에 대한 중요한 사실 하나가 영화 <인셉션>을 보며 떠올랐다. 이 사람, <메멘토>를 연출했던 감독이다! 2001년,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독특한 설정으로 기억의 정체를 파헤쳤던 바로 그 걸작 <메멘토> 말이다!

불면과 몽환의 경계 사이에서 독특한 긴장감을 선사했던 <인썸니아>(2002)까지 기억해 낸다면, 이제 우리는 <배트맨 비긴즈>(2005)와 <다크 나이트>(2008)를 통해 슈퍼 히이로의 어두운 내면으로 들어갔다가 이번 작품 <인셉션>에 도달한, 그의 영화적 여정을 관통하는 어떤 궤적의 단면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겠다.

말하자면, 그는 인간 심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 어쩌면 인간의 정체성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 즉 기억과 꿈,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를 담아내는 데 무진장 관심이 많은 자라는 얘기가 되겠다.
 
영화 <인셉션> 시사 후기의 서두를 이렇게 떼고 나니, 읽는 이에 따라선 이런 뜨악한 반응이 나올 법도 하다. "뭐야, 이거! 오락영화 아니었어?"

맞다. <인셉션>은 명백히 오락영화다. 그것도 아주 현란한 액션으로 점철된 스펙터클 오락영화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도 기억해야 한다. 그의 전작이자 뭔가 이상야릇한 슈퍼 히어로 영화 <다크 나이트>가 오락영화의 외피 안에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얼마나 흥미로운 성찰을 담아내고 있었는지.

그렇게 이 재능 넘치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아무 생각 없이 꿍꽝대는 저 숱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찌끄레기들로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음을 <인셉션>을 통해 다시 한번 증명한다. 꿈 속의 꿈, 그 꿈 속의 꿈 속의 꿈까지 탐험하며 무의식의 근저에 도달한다는 상상을 대관절 누가 이렇게 흥미롭고도 맛깔난 모험 오락영화로 담아낼 수 있겠냔 말이다. 프로이트가 살아 있다면 놀란에게 큰절이라도 올릴 일이다.

상찬은 여기까지. 줄거리는 포털 찾아보시고, 담고 있는 철학적 함의 따위는 영화가 개봉한 뒤 논하는 게 낫겠다. 다만, <인셉션>에 단순한 오락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는 관객이라면, '무의식의 조작'이라는 키워드에 주의를 기울여 보면 좋을 것 같다.

인간의 무의식에 새겨진 근원적 상처가 어떤 추악함을 만들어내는가, 라는 질문은, 이를테면 역시 디카프리오가 주연했던 마틴 스콜세지의 <셔터 아일랜드> 같은 영화에서 잘 제시한 바 있다. 이 영화는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무의식의 소유권은 온전히 우리에게 있는가, 라는 질문 하나를 더 보탠다.

그러니까 무의식의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외부 세계의 통제 시스템과 무의식과의 관계. 내가 인식하는 세계가 진짜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것처럼, 인식의 뿌리 깊은 곳에 깔려 있는 무의식 역시 과연 진짜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 어쩌면 보고자 하는 세계만 보고 싶어하는 우리의 습성을 이용해 누군가 당신의 무의식조차 지배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도전적 가설.

말하다보니 어쭙잖게 나도 모르는 말들이 튀어 나온다. 아무튼 보시라. 7월 21일 개봉.


'인셉션' 내 무의식의 소유자는 누구인가
by cinemAgora  최광희
http://mmnm.tistory.com/947

 

 

- 의식의 담론과 무의식의 담론 -
이게 다 ‘인셉션’이라는 개념 때문이다. 혹시 지각(perception)이나 통각(apperception)처럼 뭔가 쓸 만한 개념을 얻지 않을까 해서 영화관을 찾았으나, 그 기대는 과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약물을 이용해 남의 꿈에 들어간다는 발상은 <매트릭스>의 뇌 과학적 버전일 뿐이고, 불쑥 스토리의 중간부터 시작하는 미디아스 인 레스(medias in res) 기법은 이미 오래전에 고전이 된 서사전략이다. 특히 팽이가 돌아가는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 상투적인 나머지 객석의 에어컨이 잉여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지루함을 덜어준 것은 영화의 중층적 구조(꿈속의 꿈속의 꿈). 그것이 그나마 관객에게 서사를 재구성하는 지적 재미를 안겨준다. 몇 가지 세부가 끝내 이해되지 않고 남는다는 점을 빼면, 서사가 밖에서 들었던 것만큼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았다. <메멘토>의 탁월한 서사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의 서사가 그 외견상의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외려 매우 단순하다고 느낄 것이다. 한마디로, <인셉션>은 꽤 잘 짜인 영화이긴 하지만, 미학적 혹은 철학적으로 그리 인상적인 작품이라 할 수는 없다.

은밀한 영역을 몰래 엿보는 꿈은 살다가 누구나 한번쯤 가져봤을 것이다. 그 은밀한 곳은 법적, 도덕적으로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곳일 수도 있지만, 아예 논리적, 물리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한 곳일 수도 있다. 가령 똑같이 ‘프라이버시’를 침범한다 해도, 남의 침실을 들여다보는 것은 법적, 도덕적 금지에 속하나 남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물리적, 논리적 불가능에 속한다. 둘은 다르다. 나를 영화관으로 이끈 것은 후자, 즉 급진적 의미의 ‘프라이버시’를 침범하는 모티브에 대한 철학적 호기심이었다.


창 없는 단자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인간정신의 특징을 급진적 프라이버시로 규정해왔다. 가령 라이프니츠를 생각해보자. 단자(monad)란 거칠게 말하면 개별자의 의식, 혹은 영혼을 가리킨다. 그는 인간의 영혼, 의식에는 ‘창이 없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열어 그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다른 이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세계의 표상(관념)이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과 똑같은지 확인할 길은 없다. 따라서 내가 다른 이들과 동일한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고 확신할 근거도 없다. 그뿐인가?

좀비들 세상에 혹시 나 혼자만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다(실제로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는 ‘나 혼자만 의식을 갖고 있고 타인은 의식없는 자동인형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진지하게 논리적으로 검토해본 적이 있다). 이 난점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해석은 이른바 ‘예정조화설’, 즉 신이 단자들을 창조할 때 그 각각에 동일한 세계의 표상을 미리 심어놓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애초에 각 단자들 머릿속에 든 표상이 일치하도록 신이 미리 프로그래밍을 해놨다는 얘기다.

‘들여다봄’ 없이도 우리가 세계를 공유하며 타인과 소통하는 것은 순전히 이 때문이다. 각 개인은 창 없는 단자지만,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신의 프로그래밍에 따라 저절로 조율된다(‘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애덤 스미스의 가설은 이 예정조화설의 경제학적 버전이리라). 이 가설의 문제는 최초의 프로그래머, 즉 신을 가정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신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경험론자들은 여기서 회의주의로 달려간다. 같은 언어로 같은 세계에 대해 얘기한다 해도, 우리는 실은 각자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꿈의 디자이너
어지러움은 세계에 대한 이 두 대립되는 관념- 합리주의적 독단론과 경험주의적 회의론- 이 영화 속에 뒤섞여 있는 데서 온다. 꿈은 항상 그 ‘누군가’의 꿈. 그것은 회의주의자들의 세계를 닮았다. 영화의 인물들은 항상 그 ‘누군가’의 꿈에 들어간다(토템은 그들이 누구의 꿈에 있는지 말해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그 꿈을 다른 이와 공유한다. 그들은 각자 제 꿈을 꾸나, 그 꿈들은 그 누군가의 꿈속에서 객관적으로 수렴된다. 이는 합리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세계다. 물론 여기서 이 예정조화를 프로그래밍하는 것은 신이 아닌 인간이다.

이 어색함 외에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뒤섞어놓은 것도 영화의 철학적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사실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는 급진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프로이트를 통해 응축과 전이라는 꿈의 원리를 알고 있다. 꿈의 세계는 비논리적이다. 하지만 의식, 혹은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인과관계. 서사는 결국 인과의 사슬이다. <인셉션>에 나오는 꿈의 세계는 너무나 논리적이다. 서사를 무의식의 세계로 연장하려다 보니 꿈의 세계마저 거의 현실과 같은 논리로 구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영화를 어정쩡하게 만든다. 또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팽이까지 돌려가며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려 하나, 그 발상 자체가 이미 영화에서 여러 번 사용된 식상한 모티브다. 게다가 그가 섞어놓으려는 현실과 가상이 하필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가 아닌가. 이 둘의 차이는 애초에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와 현실’, <매트릭스>에 나오는 ‘가상과 현실’의 차이와는 급진적으로 다르다. 한마디로, ‘인생은 꿈’(Life is but a dream)이라는 정도의 낡은 은유 위에 스크립트를 쓰는 것은 철학적으로 너무 안이해 보인다.


'림보'라는 발상은 좋았으나....
보드리야르의 미디어론과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을 뒤섞어놓은 느낌이랄까? 주인공의 트라우마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아내는 보드리야르의 ‘돌발사태’, 즉 매트릭스 속에 불현듯 침입하는 프로그래밍되지 않은 실재를 연상시킨다. 동시에 그녀는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 그 어떤 상징계나 상상계의 질서로도 프로그래밍될 수 없는 대상을 닮았다. 그녀의 등장이 영화의 극적 긴장감을 높여주나, 여기서도 다시 두개의 질적으로 다른 담론, 즉 의식의 담론과 무의식의 담론의 혼합이 어딘지 개념적 불편함을 준다.

야박한지 몰라도 이게 내가 이 영화에 후한 점수를 줄 수 없는 이유다. 중층적 구조를 오가며 복잡한 서사를 이어나가는 감독의 영화적 역량 덕분에 두 시간 반의 러닝타임을 그리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지만, 사실 <인셉션>은 비슷한 스토리를 가진 <매트릭스>나 감독 자신의 전작인 <메멘토>에 비해 솔직히 철학적으로 언급할 만한 게 별로 없다. ‘인셉션’(inception)이라는 개념에서 뭔가 철학적 영감을 기대했던 나의 글이 졸지에 영화평 비슷해진 것은 순전히 그 때문이다.

쪽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른 것은 ‘림보’라는 발상이리라. 남의 생각을 빼내고(extraction) 내 생각을 남의 무의식에 집어넣는다(inception)는 유치한 발상에 집착하기보다는 차라리 영원한 꿈의 연옥(limbus)을 탐험하는 영화를 만들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유일하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이 바로 그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이것보다 더 꿈처럼 보이는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이 나왔을 것이고, 최소한 이 영화가 그저 <매트릭스>의 아류, 그것의 뇌 과학 버전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셉션>의 철학
by 진중권의 아이콘
http://movie.naver.com/movie/mzine/read.nhn?office_id=140&article_id=0000016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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